세 번의 고비가 있었고 결국 퇴사했다.
'몇 달만 더 버텨볼걸 그랬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스트레스에 무뎌질 수 있는 기간이 아쉬웠던게 아니라 여행 한 번 더 갈 금액을 놓친게 아쉬웠다. 퇴사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너무 자신이 못나진 것이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의 70%를 직장에서 보낸다. 그렇다보니 나도 친구들도 직종에 맞게, 어울리는 집단의 성격과 맞게 변하기 마련이다. 가치관도 성격도 온전히 내가 알던 친구들이라고 할 수 없다.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나는 내 집단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싫은 부분, 고치고 싶은 부분, 마음에 드는 부분, 자랑하고 싶은 부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회사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다른게 아니라 내가 선호하지 않는 가치관, 생활 패턴, 성격 그리고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함께 일하고 사건 사고를 겪으며 직장 동료들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고 친해지기 위해 나름의 노력했다. 하지만 머리가 굳은 나에게 그들처럼 될 수 있는 능력도 진심도 없었다. 그렇게 애쓰는 내가 한심스러웠고 못났다. 약간의 소득은 있었지만 그걸 위해 변해버린 내 모습이 불쾌했다. 이게 내가 앞으로 지켜야하는 모습인가? 그들에게서 좋은 점, 배울 점만 취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저 지쳤던 것일 수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큰 슬픔이 찾아왔을 때,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는 점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느꼈다. 더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회사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진심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위로 받았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할 새도 없이 괜찮은 척 일해야했을 것이다. 백수라서 더 행복하진 않지만 그 시간만큼은 백수여서 다행이다, 옳은 결정을 했다 싶었다.
백수 두 달 차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참 길다.
학창 시절에 10대는 10km/h, 20대는 20km/h, 30대는 30km/h ... 60대는 60km/h로 시간이 간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직장에 다니고 하루를 열심히 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평일에는 가볍게 저녁 식사하고 씻고 잤다. 그게 개인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시작됐고, 한 주가 너무 길다 볼멘소리를 하니 주말이 왔다. 달거리가 돌아와 한 달이 지났고, 새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이 들 즈음엔 계절이 바뀌었다. 속절없이 한 해 한 해 보내고 나니 우스갯소리처럼 친구에게 다음 해의 인사를 했다. 24년 1월 1일에 "우와 벌써 25년이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놀랍게도 시간이 다시 천천히 가기 시작했다.
갓 퇴사했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넷플릭스 드라마와 영화를 닥치는대로 봤다. 유치하다고 비웃었던 브리저튼까지 봤다. 정오였다. 점심 식사를 하고 유튜브를 봤다. 오후 4시였다. 쇼츠와 릴스를 보니 저녁 식사 시간이었고 뉴스, '최강야구', '나는 솔로', 심지어 'EBS 위대한 수업'을 보고 샤워했다. 새벽 1~2시에 잠들었다. 한 달 즈음 반복했을까? 도파민에 중독됐고 마음 한 켠에는 지루함이 싹텄다.
딱히 즐겁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OTT와 유튜브 시청 시간을 각 2시간으로 정하고 쇼츠와 릴스는 끊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 문득 깨달았다. 하루가 길구나.
무얼 해야할지 몰랐다.
식사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보았다. 카페에 갔다. 운동하고 산책했다. 오후 4시였다.
집안일만큼 시간이 잘 가는 일이 없겠지 싶어서 아침부터 욕실 청소하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하고 세탁했다. 빈틈없는 하루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빨리 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힘들면 시간이 빨리 갔고, 지루할 때에는 시간이 느리게 갔지만 하루는 빨리갔다. 그런데 집에서는 시간이 빨리 가지만 하루는 느리게 갔다. 이게 맞나? 좋은건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확실한 것은 나이가 든다고 시간이 빨리 가는게 아니었다. 나이 들고, 직업을 갖고, 책임이 생기고, 반복되는 하루가 고정되면 그 때 시간을 빠르게 느끼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퇴사하니 어떻냐며 물어서 감상을 나눴다. 한 친구는 갑자기 하루가 길다는 말이 너무 마음을 울렸다고 했다.
어제가 무슨 요일이고 오늘이 몇 일인지를 간 밤 사이에 쌓인 메일을 보고 알았는데, 길에는 고양이만 보였는데
해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것으로 시간이 흐르는걸 알고,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벌레도 새도 보이더라
감수성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설명을 덧붙이고 싶었는데 그냥 한 문장으로도 충분했나보다. 친구가 퇴사한 사람의 감상이나 일기를 써보는게 어떻냐고 말했다. 글 솜씨가 없어서 웃고 넘어갔는데 한 달이 지나, 친구가 또 하루가 길다는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그제서야 친구가 많이 지친게 보였다.
고비가 온 직장인한테는 묵직한 말이었나보다. 쉴새 없이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일하는 친구는 많이 지쳐있었다.
친구에게 와닿은 이 대책 없는 여유를 많이 지친 다른 누군가도 관망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